날 좀 내비둬

병원의 화상센터장이 공석이라고 한다

약 1개월 전에 갑자기 응급의학과 과장님이 날 불러서 웬일인가 하고 갔는데, 나에게 화상센터장을 하는게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다. 며칠 시간을 갖고 생각해 본 후 거절을 했는데, 이후부터 계속 센터장을 하라고 연락이 오고 사람이 찾아오고 그랬다. 심지어 어제는 부원장님이 직접 찾아와서 화상센터장을 하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하셨고 또 거절했다. 그리고 오후에 다시 부원장님이 연락을 해서 이번주 금요일에 원장님이 만나자고 했다고 했다.

딱히 다른 이유는 아니다.
그냥 건강이 안좋아서 그렇다. 인턴 1년과 전공의 4년, 그리고 전문의 5년을 지내면서 계속되는 당직과 수술로 몸이 엄청나게 축이 났고, 심한 불면증과 우울증으로 요즘도 약을 먹고 진료를 보고 있다. 매일밤 약을 먹고 자도 두 번은 반드시 깨서 방황하다 잠이든다. 이런지 벌써 수 년째가 되고 있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못하니 낮에 만성 피로와 예민한 감정으로 일을 하다가도 한번씩 욱하는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가 있다.
혼자 곰곰히 생각해 봤을때 이런 모든 증상은 충분한 휴식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발생한 것이고, 불충분한 휴식은 낮은 수면의 질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가급적 당직을 서지 않고 지내려고 노력하고 있고, 수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거의 모든 약물이나 기호식품을 피하며 지내고 있다. 물론 이렇게 자세한 사정을 직장내 다른 사람에게 설명한 적은 없다. 말 해봐야 득도 되지 않을 것이고, 쓸데없는 소문이 나는것이 싫어서 그랬다. 그래도 분명히 이번 화상센터장 임명 문제때 ‘건강상의 이유’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싹 무시하고 계속 센터장을 하라고 권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과는 별개로 어제 오후에 부원장님이 새로 만들고자 하는 화상센터의 도면을 가지고 오셨는데 그걸 보고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rule

위의 자료는 정부에서 기준으로 삼고 있는 화상응급센터의 건립 기준인데 중환자실 병상이 8개, 일반입원실의 병상이 30개 이상을 가져야 하며 멸균병상을 2개 가져야 한다고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설계도는 이 내용을 그대로 반영한 형태였다. 뭐 당장 보기에는 그런가보다 하지만 병원 리모델링에 화상관련 정보를 제공해 줄 사람이 없어 힘들다고 하도 뭐라 하기에 찾아본 자료와 비교해보면 말도 안되는 자료였다.
중증화상환자에서 가장 신경쓰는 부분은 ‘감염관리’다. 피부가 가지고 있는 본연의 방어기능이 없어진 상태라 어떻게든지 감염을 차단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이 기준이나 병원에서 만들어 놓은 기준에는 “개방된 형태”의 중환자 병상 8개가 표시되어 있었다. 개방된 병상이라고?! 몇 년전에 인도(India)에서 건립한 화상센터 논문을 봐도 집중치료실은 전부 격리실이었다. 심지어 각각의 방을 HVAC으로 철저하게 관리하는 형태였다. 근데 정부 기준은 말도 안되는 개방된 병상 8개를 기준으로 삼고 있었고, 가장 흔하게 교차감염이 발생하는 처치실의 운영을 권고하고 있었다.

….이대로 설계가 끝난다면 당연히 화상센터 인증은 받을 수 있겠지만, 어디 광고하기도 창피한 웃기지도 않는 기준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화상 전문의 한 명 밖에 없는 우리병원에서 집중치료실에 총 10명의 환자를 보라고 주장하는 경영진 측의 아이디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경험상 총체표면적 50%가 넘어가는 중증 화상환자의 ‘내’ 사망율은 90%에 달했다. 물론 살아난 사람도 여럿 있기는 했지만 복잡한 상황과 문제 때문에 많은 환자가 사망했고 개인적으로는 내가 아직 한참 모자라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혼자서 열 명을 보라니. 나보고 죽으라고 말 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주문이었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중증화상 환자가 내 환자로 3명 이상 있으면 반드시 사망이 발생했다. 3명이면 2명이 사망했고, 4명이면 3명이 사망했다. 운이 좋아 2명이 살아난 경우도 있지만 중증화상 환자는 그렇게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고 진짜 담당의사의 피를 쪽쪽 빨아먹으며 환자가 살아나기 때문에 의사인력이 많이 필요한 부분이다. 그런데 우리병원은 세 명의 성형외과 의사와 한 명의 외과의사(나)가 있는 상태이고 실제로 중증화상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나 혼자다. 이런 상황에서 도합 열 명이나 되는 화상환자를 받으라고 하는 건 입원시킨 환자들 보고 다 죽으라고 하는것과 다르지 않은 일이다.
인력의 확충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 말도 없으면서 센터를 건립하겠다는 마인드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화상 응급센터’가 되면 앞으로 더 이상 화상환자를 타병원으로 전원시키는 일을 할 수 없다고 하는데, 여기가 무슨 지옥 문턱도 아니고 들어오는 환자보고 다 죽으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원장님 자체가 응급실 출신 의사이기 때문에 ‘응급센터’에 집중을 하고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밖에 없다. 당장 나라도 원장이 되면 ‘외과 중심의 병원경영 정상화’같은 안이안 생각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건 좀 아닌것 같았다. 남들은 집중치료실을 전부 격리실로 만들고 헤파필터 설치하고, 헤파필터를 통과한 공기를 다시 자외선으로 살균하고, 침상의 모든 의복과 천을 일회용 플라스틱 시트로 바꾸고 있으며 소독기를 통한 개별 샤워기까지 설치하는 마당에 ‘개방된 형태의 집중치료실’이나 만들고 교차감염의 산실인 공용 처치실이나 만드는게 말이나 되는 소리일까? 당장 화상응급센터 개설했다고 광고하면 전국적으로 웃음거리가 될 것 같은데 정말 무슨 생각인지..
이 상태로 센터장이라도 되었다간 동네 병신으로 인증되어 조롱이나 받을게 확실해 보였다.

물론, 화상센터장을 했다고 말하면 취직자리가 조금 더 많아지긴 할 것이다. 전국적으로 특수 화상을 보는 유일한 병원의 화상센터장을 했다고 하면 사람들이 ‘오오오~’ 해 줄 것이고 나도 경력에 한 줄 더 써넣을 수 있겠지. 그렇지만 난 건강이 안좋은데다 이런 병신같은 형태의 화상센터를 내 이름으로 건립한다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두고두고 조롱거리나 될 센터에 내 이름을 새기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고, 절대 다른 곳으로 전원시킬 수 없는 화상 중환자를 열 명이나 채워넣어 시체장사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금요일에는 어떻게든 못한다고 버텨볼 생각이다. 무슨일이 있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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