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한 취미

지난 토요일(26일) 출사를 다녀왔다

이번 주말이 응급실 콜을 받는 날이라 좀 신경이 쓰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자칭 ‘출사’를 다녀왔다.

거의 1개월 이상 별 사진을 찍기위한 노력을 중단하고 있었기에 왠지 모른 어색함과 불편함을 꾸욱 참고 백마고지 전적지로 향했다. 토요일 외래를 끝내고 집에 왔다가 오후 4시에 출발을 했다. 생각보다 차가 덜 막혀서 다행이긴 했는데 도착하니 시민박명도 한 시간이나 남은 5시 12분에 도착을 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곳이라 생각했는데 철원의 백마고지 전적지는 은근히 사람이 있었고 자전거 여행객 두 명과 자동차 여섯대가 떠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차에서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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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무엇일까

오후 6시 15분이 지나 시민박명이 시작된 것을 보고 장비를 꺼내기 시작했고, 또다시 심한 추위에 노출된다는 생각에 왠지 모를 아픔을 상상하며 하나 둘 짐을 꺼내 주차장 한켠에 놓기 시작했다.
여기서 잠깐 시간에 대한 설명을 하자면…

  • 시민박명 : 해가 지평선 아래로 내려갔고 주위에 어둠이 지기 시작하나 아직 완전한 어둠이 깔리지 않아 대부분의 일상생활이 가능한 시기. 불빛 없이 길을 걷는다거나 표지판의 글자를 읽을 수 있다.
  • 천문박명 : 어둠이 짙게 깔리어 불빛 없이는 길을 걷거나 일생생활을 하기 어려운 상태로, 하늘에 별이 하나 둘 씩 나타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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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가 시민박명

오랫만에 해서 그런지 망원경을 설치할 때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었다. 보통 경통(망원경의 렌즈가 들어있는 통. 망원경의 본체)을 설치하기 전에 극축정렬(Polar alignment)을 해야 하는데 그 순서를 틀려 경통을 얹은 다음에 극축정렬을 시작했고, 표류이탈법(Draft method)으로 세부 정렬을 해야 하는데 그것도 까먹고 안 해버린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심지어 파인더 스코프와 주 망원경(경통)의 표적 정렬도 제대로 하지 않아서 망원경 설치하다 급하게 진행했다.
이런 저런 시행착오와 실수를 수차례 반복한 후, 간신히 망원경과 카메라를 연결할 수 있었는데, 거기서 또 문제가 발생했다. 내 노트북은 USB포트가 달랑 두 개 있었던 것이다!

천체사진을 찍을 때 천체망원경은 거대한 렌즈가 달린 컴퓨터 카메라처럼 작동한다. 파인더 스코프에 설치된 가이드 카메라로 별의 위치를 확인하고, 조금씩 움직이는 천체를 컴퓨터를 통해 추적을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 카메라(사진을 찍기위한 카메라)에서 영상을 얻어내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런 일련의 작업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려면 모든 장치가 컴퓨터에 연결되어야 하는데 USB포트가 하나 모자라 제대로 작동시킬 방법이 없어진 것이었다. 이런건 미리 알았어야 하는데 내가 너무 안이했다는 생각을 하며, 가이드 카메라를 제거한 후 육안으로 대상을 맞추고 순수하게 망원경 마운트의 추적능력에 기대기로 했다. 여기서 철수는 또 수 주를 기다려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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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오리온 대성운을 찍으려고 했다. 그렇데 5분 노출을 주고 테스트를 해보니 마운트의 오차로 인해 주위 별들이 흘렀고, 이건 안되겠다 싶어 시리우스(Sirius, 천랑성)을 찍기로 결심했다.
바흐티노프 마스크(Bahtinov mask)로 초점을 맞추고 LRGB필터별로 각 10장씩, 노출 3분을 줘서 사진을 찍기로 최종 결정했고, 총 120분의 노출과 추가 30분의 다크 프레임 촬영을 진행했다.

추웠다. 미국에서 영하 20도에도 끄덕 없다는 코트와 신발, 그리고 바지를 사서 입었지만 발가락 끝이 너무 시렸고, 손가락이 얼어붙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이리저리 막 돌아다니면 망원경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그러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앉아 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차 안으로 길게 케이블을 연결해 차 안에서 촬영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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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의 추위에도 끄덕 없다는 부츠는 발가락 부분이 너무 시리고 전혀 제 기능을 못 하는 것 같았다

중간에 백마고지 근처 부대의 원사님이 순찰을 돌고 갔으며, 밤 11시가 넘어서야 모든 촬영을 끝내고 짐을 쌀 수 있었다.

천체 사진의 촬영은 고통스러운 작업이었다. 단순 관찰은 아이피스에 눈을 대고 천체를 살펴보고 자세를 계속 바꿔가며 왔다갔다 하는 일이었는데 사진 촬영은 완전히 달랐다. 마치 망부석마냥 꼼짝도 안하고 카메라 노출을 끝마칠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리는 작업이었다. 참호에 들어가 있는 군인들도 이런 고통을 겪겠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돌아오는 길에 노동당사 사진을 찍었고 철원읍 거리의 사진도 찍었다.

전문 천체사진 작가들은 나보다 짐이 훨씬 많다고 들었다. 안정적인 전원을 위해 소형 발전기를 가지고 다니는 분도 있다고 들었으며, 망원경의 삼각대나 마운트도 나보다 훨씬 크고 무거운 장비를 들고 다니며 망원경이 바람에 흔들리지 않도록 윈도 스크린까지 들고 다닌다고 들었다. 전에 어떤 사진작가에게 물어보니 대부분의 촬영지가 산 정상 근처이며 심할때는 영하 20도까지 떨어진다고 했다. 거기서 그들은 하룻밤을 꼬박 새며 심우주 천체 하나를 위해 몇 시간을 버티며 기다리는 것이었다. 거기다 그렇게 고생해서 영상을 얻고 나면 집에 와서 수 시간에 달하는 후처리 과정을 거친다고 했다 (나도 아직 못했다. 소프트웨어가 엄청나게 복잡하고 어렵다).

별거 아닌 별사진이라고 쉽게 말하며, ‘온통 보정했네요. ㅋ’라고 놀리는 사람이 많다고 들었다.

일단 해보라고 권해보고 싶은 하루였다. …다음주에 또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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